반응형
안녕하세요.
봄꽃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출 무렵, 압도적인 크기와 우아한 자태로 정원의 주인이 되는 꽃이 있습니다. 바로 '꽃들의 왕'이라 불리는 모란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귀한 대접을 받아온 모란이지만, 그 화려한 꽃잎 이면에는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약재로서의 희생과 쉽게 툭 떨어져 버리는 쓸쓸한 숙명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모란의 붉은 찬란함과 그 이면의 이야기를 담은 시 한 편과 함께 숲과 꽃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자작시]
모란
모란은 제 몸보다 먼저 왕관을 쓰는 꽃이다
다른 꽃들이 바람의 눈치를 살필 때
망설임 없이 세상의 중심으로 걸어 나온다
겹겹의 꽃잎은 비단 치마처럼 무겁고
붉음은 오래된 궁궐의 단청보다 깊다
누군가는 부귀라 불렀고 누구는 영화라 칭송했다
왕비의 소매 끝에서 저녁 햇살처럼 흔들리던 꽃
가장 화려한 것이 가장 먼저 진다는 숙명을 알아서일까
왕조의 운명처럼 툭, 낙화할 때
정원은 잠시 숨을 잃는다
당나라 장안의 봄밤을 취하게 했던 붉은 물결
선덕여왕은 그림 속 꽃 곁에
나비 한 마리 없음을 먼저 보았다
향기 없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쓸쓸한가를
어린 공주는 일찍이 예감했던 것일까
볕이 오래 머무는 서쪽을 꺼리고
바람 앞에서 쉽게 고개를 떨구는 것은
화려함조차 상처 입기 쉬운 살결이라는 고백
타오르는 정오보다 낮은 그늘을 사모하는 꽃
사람들은 눈부신 꽃봉오리만 보았지만
모란은 평생 제 뿌리의 고통을 길어 올렸다
약(藥)이 되기 위해 스스로 껍질을 벗겨 내고
누군가의 열을 식혀 주던 서늘한 밤들
아름다움이란 타인의 아픔을 대신 품는 일인지도 모른다
봄날 모란 앞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꽃이 아니라 찬란함 뒤에 가려진 소멸을 본다
그리고 그 스러짐 너머 다시 한 계절을 밀어 올릴
단단하고 검은 씨앗 하나를 품어 가는 것이다

[모란, 우리가 몰랐던 숨은 이야기]
시의 구절처럼 사람들은 눈부신 꽃봉오리에 찬사를 보내지만, 모란의 진짜 이야기는 그 이름과 뿌리, 그리고 얽힌 역사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 이름에 담긴 뜻과 생태적 비밀
-
수컷(牡)과 붉음(丹) : 씨앗을 맺지만 굵은 뿌리 위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이 수컷의 형상과 같아 '모(牡)' 자를, 꽃이 붉어 '단(丹)' 자를 써서 모란이 되었습니다.

-
모란과 목단 : 중국과 일본에서는 '모단'이라 읽지만, 우리나라의 『삼국유사』에서 '목단(牧丹)'으로 잘못 표기한 것이 굳어지며 두 이름이 혼용되었습니다. 현재 표준어 규정에서는 둘 다 인정하지만, 읽을 때는 '모란'과 '목단'을 구분해서 발음합니다.

-
서늘한 밤을 품은 약재 : 한랭지 식물인 모란은 뜨거운 서향 볕과 거센 바람을 꺼립니다. 깊은 땅속에서 자라난 뿌리의 껍질은 '목단피(牧丹皮)'라 하여 소염과 진통에 쓰이는 귀한 한약재가 됩니다. 아름다움으로 눈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껍질을 벗어 타인의 고통을 달래주는 서늘한 품을 지녔습니다.

2. 부귀영화의 상징과 선덕여왕의 일화
꽃말 자체가 '부귀', '영화', '왕자의 품격'인 모란은 동양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
장안의 화제, 꽃의 왕 : 당나라 시절 장안에서는 모란 감상이 대유행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설총의 『화왕계』에서 꽃들의 왕으로 의인화되었고, 조선시대 신부의 활옷이나 궁중의 병풍에 빠짐없이 수놓아지며 부귀화(富貴花)로 사랑받았습니다.

-
선덕여왕과 나비 없는 그림 : 당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라 간파했다는 선덕여왕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실제로는 모란에도 은은한 향기가 있지만, 당나라 화풍의 상징성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모란은 부귀를, 고양이는 70세, 나비는 80세의 장수를 상징하는데, 고양이 그리기가 어려워 생략하면서 짝이 맞는 나비도 함께 뺐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
조선 선비의 시선 : 강희안은 『양화소록』에서 지조를 상징하는 매, 난, 국, 죽 등을 1품으로 두고,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은 2품으로 두었습니다. 화려함보다는 내면의 절개를 중시했던 조선 선비들의 꼿꼿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3. 봄을 여의는 슬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김영랑 시인의 유명한 시구처럼, 모란은 봄의 끝자락을 장식하며 무거운 꽃잎을 통째로 툭 떨구어냅니다. 그 장엄한 낙화는 화려했던 봄날과의 작별을 의미합니다.

[맺음말 : 소멸 너머의 단단한 씨앗을 품으며]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피어났다가, 절정의 순간에 미련 없이 무거운 꽃잎을 떨구는 모란. 그 툭, 떨어지는 낙화 앞에서는 왠지 모를 장엄함마저 느껴집니다.

올봄, 정원에서 모란을 마주하게 된다면 화려한 꽃잎만 보지 마시고, 그 아래 묵묵히 서늘한 약재가 되어주는 뿌리의 인내와, 스러짐 너머에 다음 봄을 기약하는 작고 검은 씨앗을 함께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타인의 아픔을 대신 품는 모란의 깊고 넓은 위로가 여러분의 마음에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반응형
'시로 읽는 숲과 꽃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시로 읽는 숲과 꽃이야기] 모진 계절을 견뎌내고 금빛 인연으로 남는 꽃, ‘인동초’ (0) | 2026.06.02 |
|---|---|
| [시로 읽는 숲과 꽃이야기] 침묵을 깨고 피어난 한 송이 커다란 마음, ‘작약’ (2) | 2026.05.21 |
| [시로 읽는 숲과 꽃이야기] 하얗게 피어난 간절함, 이팝나무 (White Fringetree) (3) | 2026.05.01 |
| [시로 읽는 숲과 꽃이야기] 봄날의 아득한 망설임, 철쭉(Royal Azalea) (0) | 2026.04.21 |
| [시로 읽는 숲과 꽃이야기] 익숙한 봄의 풍경 이면에 담긴 이야기, 벚나무 (3) | 2026.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