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숲과 꽃이야기

[시로 읽는 숲과 꽃이야기] 뼛속을 비워 띄워 보낸 모정(母情)의 홀씨, ‘민들레’

이천거북이 2026. 9. 20. 18:46
반응형

1. 들어 가는 글

이른 봄, 언 땅이 녹아내리기 무섭게 길가와 들녘의 낮은 곳에서 노랗고 하얀 별처럼 피어나는 꽃이 있습니다. 밟히고 꺾여도 다시 일어나 땅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바로 민들레(Taraxacum mongolicum)입니다.
토종 흰민들레꽃
사람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솜털 씨앗을 보며 가벼운 탄성을 지르지만, 그 둥근 갓털 뒤에는 날기 위해 제 속을 비워내고 홀로 남겨진 어머니의 깊은 눈물이 서려 있습니다. 저의 첫 번째 시집 "해바라기 씨앗은 몇 개일까"에 날아오르는 홀씨와 남겨진 어머니를 노래한 자작시 '민들레' 전문을 먼저 올립니다.
날아가기 직전의 민들레의 씨

[자작시]

민들레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며
민들레는 꽃을 피웠어요
하늘을 날고 싶었거든요
날기 위해 뼛속을 비운다는 새처럼
줄기를 텅텅 비웠나 봐요
나비에겐 팔랑거리는 법을 배웠어요
꽃 속에서 부풀던 마음이 씨앗으로 전부 맺혔어요
멀리까지 내다보려고 허리를 곧추세우며
키를 두 배로 늘렸어요
하늘로 날려면 옆의 풀보다 높아야 해요
움츠렸다 멀리 뛰는 개구리처럼
거칠 것이 없어야 높게 멀리 날 수 있어요
하늘 높이 떠 있는 뭉게구름처럼
가볍게 도약할 수 있게 깃털을 둥글게 펼쳤어요
무작정 기다리던 바람을 만납니다
한 생이 여러 생을 낳아 떠나보냅니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와~하고 소리쳤지만
난 홀로 남겨진 어머니만을 떠올렸습니다
토종 민들레꽃

2. 인문학적 이야기: '일편단심'의 넋과 자식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마음

민들레라는 이름 뒤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산골 마을에서 할아버지와 소박하게 살아가던 처녀 '민들레'. 큰 비로 집이 떠내려가 개울 건너 총각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두 사람은 애틋한 사랑을 싹틔웠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금혼령과 함께 공녀 징집의 비극이 닥쳤고, 총각을 향한 사랑을 영원히 지키기 위해 민들레는 끌려가던 도중 은장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이듬해 그녀가 쓰러진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일편단심(一片丹心)'의 상징인 하얀 민들레였다고 합니다.
토종 흰민들레꽃
하지만 민들레의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또 하나의 거룩한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시 속에서 노래하듯, 민들레는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제 뼈의 무게를 덜어내듯 줄기 속을 텅 비워냅니다. 꽃이 지고 나면 키를 두 배나 곧추세워 주변의 거친 풀숲을 넘어서고, 자식들이 거칠 것 없이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둥근 솜털 낙하산을 펼쳐줍니다.
활짝 펼친 민들레 씨앗
“한 생이 여러 생을 낳아 떠나보냅니다 / 지나가던 아이들이 와~하고 소리쳤지만 / 난 홀로 남겨진 어머니만을 떠올렸습니다.”
바람 한 점에 수많은 자식들을 세상으로 훨훨 날려 보내고, 마침내 텅 빈 꽃대만 우두커니 남아 고요히 대지를 지키는 민들레의 뒷모습은 영락없이 우리 어머니의 야윈 어깨를 닮았습니다.
토종 민들레의 특징(꽃을 위로 싸고 있는 꽃받침)

3. 식물학적 특징과 토종 민들레의 분별법

민들레는 잎이 날개깃처럼 깊게 갈라져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겨울을 나는 로제트(방석) 식물입니다.
  • 자태와 두상화 : 4~5월이 되면 뿌리에서 꽃대가 올라와 그 끝에 노란색 또는 흰색의 두상꽃차례가 달립니다. 땅을 노랗게 뒤덮어 봄을 알린다 하여 선조들은 이를 '만지금(滿地金)'이라 부르며 반겼습니다.

땅을 뒤덮은 민들레꽃

  • 토종 민들레와 서양민들레의 구분 :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민들레 중 상당수는 귀화식물인 서양민들레(T. officinale)입니다. 두 꽃은 꽃송이를 받치고 있는 꽃받침대(총포)로 손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서양민들레의 특징(아래로 굽어진 꽃받침)

4. 쓰고 시린 성정 속에 품은 치유의 힘, 포공영(蒲公英)

민들레의 줄기를 꺾으면 하얀 젖빛 즙이 배어 나옵니다. 혀끝을 아리게 할 만큼 쓴맛을 지니고 있어 예로부터 '고채(苦菜)'라 불렸지만, 그 쓴맛 속에 강인한 생명력과 치유의 약성이 숨어 있습니다.
산민들레
  • 한방의 명약, 포공영 : 식물 전체를 그늘에 말린 것을 한방에서는 '포공영(蒲公英)'이라 부릅니다. 열을 내리고 해독하며 소화를 돕는 데 긴요하게 쓰입니다. 민들레 단독으로 쓰기보다는 다른 약재와 조화롭게 처방할 때 그 효능이 배가됩니다.
  • 민간의 지혜 : 위궤양으로 속이 쓰릴 때는 새로 돋아난 여린 잎을 씹어 먹어 달랬고, 뱀이나 벌레에 물렸을 때는 뿌리를 짓찧어 환부에 붙여 독을 가라앉혔습니다. 또한 꽃만을 따서 말려두었다가 피가 부족한 빈혈이나 허약해진 기운을 보하는 데 달여 마시기도 했습니다.

흰민들레꽃

5. 마치는 글

민들레의 꽃말은 '사랑의 신', 그리고 '무분별'입니다. 조건 없이 어디로든 날아가 척박한 보도블록 틈이든 메마른 언덕이든 가리지 않고 뿌리를 내리는 그 무분별한 사랑이야말로, 생명이 세상에 건네는 가장 숭고한 헌신일 것입니다.
서양민들레
불어오는 바람에 기꺼이 자식들을 실어 보내며 제 텅 빈 몸으로 남겨진 어머니의 마음. 올봄 길가에 피어난 민들레 홀씨를 마주하거든, 그저 바람에 날려 보내기 전에 제 몸을 다 비워낸 꽃대의 침묵과 그 깊은 사랑의 무게를 가만히 헤아려 보시길 권합니다.
반응형